카테고리 없음
터키여행기15 - 다시 이스탄불로
morphix
2005. 6. 20. 00:27
이스탄불에 도착했다. 첫 날 도착해서 묶었던 동양호텔 7인실 도미토리에 갔는데, 휑하니 아무도 없다. 그 때 만났던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 곳에서 예전 이스탄불을 떠나기 전에 만났던 정현이와 재회했다. 이 친구는 그 동안 그리스 돌다 왔다고 한다.
오후에는 초라교회를 갔다. 이스탄불이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을 때, - 그 당시 이스탄불의 이름은 잘 알려진 콘스탄티노플이었다 - 기독교 문화의 본산지는 아야 소피아였다. 하지만 오스만 투르크의 침략 후 아야 소피아의 벽화는 회칠로 덮히고, 첨탑이 세워지는 등, 기독교 문화 중심으로서의 위치를 잃어간다. 아야 소피아에서 밀려난 기독교 신자들이 다시 뭉친 곳이 바로 초라교회이다. 다행히 오스만 투르크는 기독교인을 박해하지는 않았고, 기독교인들은 다시금 초라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며 벽화를 그렸다. 이 곳에서 손상되지 않은 그 시대의 아름다운 벽화를 만날 수 있다.
초라교회에서 걸어 내려오는 길에 데모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무슨 일로 데모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꽤 큰 규모였다. 사람들의 행렬이 길게 계속되었다.
또 길을 계속 내려오면서 여러 모스크에 들락날락 했다. 이스탄불에는 천 개가 넘는 모스크가 있다고 한다. 그러다가 우연스럽게 파티히에 오게 되었다. 이 곳에는 말에 올라탄 술탄 마흐멧트 2세의 동상이 서 있다.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여 동로마 제국을 무너뜨린 바로 그 술탄인데, 동상이지만 마치 말이 당장에라도 높은 곳을 향해 뛰쳐올라갈 거 같은 그 기세가 돋보였다. 파티히란 코란의 서두 1장을 가리키는 말인데, 술탄 마흐멧트 2세는 파티히라는 칭호를 받았다. 얼마나 위대한 술탄인지를 가늠할 수 있다. 그 이름은 현재 지역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초라교회 벽화
데모장면
파티히

그 곳에서 예전 이스탄불을 떠나기 전에 만났던 정현이와 재회했다. 이 친구는 그 동안 그리스 돌다 왔다고 한다.
오후에는 초라교회를 갔다. 이스탄불이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을 때, - 그 당시 이스탄불의 이름은 잘 알려진 콘스탄티노플이었다 - 기독교 문화의 본산지는 아야 소피아였다. 하지만 오스만 투르크의 침략 후 아야 소피아의 벽화는 회칠로 덮히고, 첨탑이 세워지는 등, 기독교 문화 중심으로서의 위치를 잃어간다. 아야 소피아에서 밀려난 기독교 신자들이 다시 뭉친 곳이 바로 초라교회이다. 다행히 오스만 투르크는 기독교인을 박해하지는 않았고, 기독교인들은 다시금 초라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며 벽화를 그렸다. 이 곳에서 손상되지 않은 그 시대의 아름다운 벽화를 만날 수 있다.
초라교회에서 걸어 내려오는 길에 데모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무슨 일로 데모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꽤 큰 규모였다. 사람들의 행렬이 길게 계속되었다.
또 길을 계속 내려오면서 여러 모스크에 들락날락 했다. 이스탄불에는 천 개가 넘는 모스크가 있다고 한다. 그러다가 우연스럽게 파티히에 오게 되었다. 이 곳에는 말에 올라탄 술탄 마흐멧트 2세의 동상이 서 있다.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여 동로마 제국을 무너뜨린 바로 그 술탄인데, 동상이지만 마치 말이 당장에라도 높은 곳을 향해 뛰쳐올라갈 거 같은 그 기세가 돋보였다. 파티히란 코란의 서두 1장을 가리키는 말인데, 술탄 마흐멧트 2세는 파티히라는 칭호를 받았다. 얼마나 위대한 술탄인지를 가늠할 수 있다. 그 이름은 현재 지역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초라교회 벽화

데모장면

파티히
